시를 좋아하게 된 건 한순간이었다. 시를 읽기 전까지 나는 줄곧 소설, 그중에서도 한국소설을 부지런히 읽어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소설이 재미가 없어졌다. 그렇다고 인문학이나 경제경영 같은 자기계발서랑 친해진 것도 아니었다. 책은 언제나 내 곁에 있는데도, 가끔씩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책과의 권태기가 시작된 것이다. 장문의 텍스트를 읽기 힘든 하루 하루를 보내던 중, 시작한 것이 시 읽기였다.
시는 중/고등학교 때 배운 것이 전부라, 시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좀 진부하고 올드하다'라는 것이었다. 가끔씩 시집을 산 적은 있지만(1년에 한 두 번?), 항상 끝까지 읽은 적은 없었다. 짧고 의미를 알 수 없이 감상적인 텍스트를 어떻게 읽고 소화시켜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김상혁 시인의 <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이라는 시집을 읽으면서, '현대시는 이런 것이구나'라는 걸 처음 경험한 것 같다.
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 / 김상혁 / 현대문학
<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은 현대문학 출판사 PIN 시리즈 중 하나로, 김상혁 시인의 3번째 시집이다. 김상혁 시인의 단독 시집 중에는 가장 입문하기 좋은 시집(?)이라 할 수 있다. 책은 부피가 작고 수록된 시의 양도 문학동네나 민음사에서 나온 다른 시집에 비해 적은 편이다. 시집의 끝에는 김상혁 시인의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시집을 내면서 시인이 갖고 있었던 생각이나 관점을 엿볼 수 있어 좋다. 김상혁 시인은 이전의 다른 시집과는 다르게, <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에서 친구나 가족, 아이들, 시인 등 주변 인물들을 주제로 한 시를 여럿 수록했는데 이 점이 뒤에 실린 에세이와도 연결되었다.
사실 시에 대해서는 그냥 책을 사서 읽을 줄만 알지, 시를 제대로 읽는 법이나 평론 쪽으로는 지식이 전무한 터라 리뷰한다는 것조차 막막하게만 느껴진다. 김상혁 시인의 시를 좋아하고 그가 내는 책은 다 사서 보려고 하지만, 정작 '왜 좋은지'는 아직도 모르겠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좋아도 왜 좋은 줄 설명할 수 없는 게 시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시집 하나 하나에 대한 설명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시 몇 구절을 여기에 기록해놓기로 한다.
소설을 덮었더니 아내가 없었다. 나는 중요한 인물을 놓쳤구나, 시간이 너무 흘렀구나 싶었다.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책을 읽겠구나 싶었다. 밤이 얼마나 깊었냐 하면 아까 만진 게 너의 발인지 영혼인지 모르겠다 싶었다.
소설 속 배경은 뉴욕이었다. 어쩌면 거기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다. 배경마저 버리고 나갔나 싶었다.
어둠 속에 사람 하나 사람 둘...... 그리고 고양이나 컵을 센 것 같았다. 좋은 책은 독자에게 말을 거는 법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고 싶었다.
그 생각이 얼마나 깊었냐 하면 세상엔 정말 천사가 존재해서
종잇장 같은 손을 바다 밑으로 끝없이 내려주고 있었다. 고난, 위기, 죽음을 극복한 주인공이 살겠구나 싶었다.
아내가 이걸 모르겠다 싶었다. 대서양을 표류하는 인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손목이 녹고 어깨가 무너지고 마음까지 그랬구나 싶었다.
밤이 얼마나 깊었냐 하면 어둠 속에 눈빛이 영혼같이 빛났다. 책 속엔 정말로 그런 게 존재해서
사람을 사람이 구해주고 있었다. 자유와 시간이 무한히 남았구나 싶었다.
- 아내가 이걸 모르겠다 싶었다, 김상혁
한 유명 작가의 낭독회에 갔었다. 젊은 유명 작가 주변에는 사람이 구름처럼 온다. 낭독이 시작되기 전 매우 아름다운 독자가 꽃을 선물했다. 꽃을 보고 있던 게 아니라, 독자가 건넨 그것이 오랫동안 말라가는 작가의 서재를 생각했다.
(...)
고백 투 소설의 한 구절, '젋음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지겹고 길었다'는 부분에서 꽃을 건넸던 여성이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거기서 눈물을 보고 있던 게 아니라, 눈물을 머리까지 밀어 올린 어떤 용기와 애정에 대해 생각했다.
꽃이 아름답다, 별이 아름답고, 그래서 모든 게 아름답다, 아무도 그렇게 쉽게 말하지 않았던 그날의 낭독회에서
- 쉽게 말하지 않았던 그날의 낭독회에서, 김상혁
엄마가 필요한 때가 있고
아빠가 필요한 때가 있다
어제는 책 몇 권이 필요해 서점에 갔다
서점에서 책에 빠진 친구가 빛나는 때가 있고
다 읽지도 못할 책을 욕심껏 담아 온 내가 더 빛나는 때가 있다
그렇게 쌓아둔 물건이 필요한 때가 있다
그렇게 방치된 집이 부모와 물건보다 더 필요한 때가 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대문 앞에서 인사하고 돌아섰는데
내 속에 너무 사랑이 없어서 놀라는 때가 있고
그럴 때 필요한 좋은 음식점이 중심가에 있다
막히는 길 뚫고 차로 몇시간을 달려서
먹어요, 그럼 먹을게요, 퇴근길 식탁은 가끔 이렇게 다정한데
엄마, 아빠 친구 모르게 두꺼워지는 어둠이 있다
(...)
- 고치지 않는 마음이 있고, 김상혁
<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에서는 일상 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나 어떤 상황에 대한 화자의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몸은 현실에 있지만 연결되는 생각의 고리를 그림 그리듯이 생생하게 표현한 '아내가 이걸 모르겠다 싶었다'라는 시는 읽은지 오래되었는데도, 내가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시이다.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 김상혁 / 문학동네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는 김상혁 시인의 2번째 시집으로, 문학동네에서 나왔다. 이전에 기록한 <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과는 달리, 일상생활이나 실존하는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경험담 형식의 시는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에는 '이야기'라는 소재를 활용해 사람 간에 교차되는 슬픔이나 기쁨과 같은 감정을 다룬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나는 나보다 슬픈 사람을 다섯이나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몽유병자, 주정꾼, 어린 자식을 둘이나 잃은 부인도 있어요 나는 그들을 다 병원에서 봤습니다
잠결에 자신을 찔렀고, 취해서 애인을 때렸고, 아이들이 바다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네요 너는 어떻게 되었니? 너도 우리만큼 슬프니? 나에게 질문하였습니다
하나같이 슬픔의 왕들이에요 나에게도 병원이 필요하지만 나 같은 게 병원에 와도 되는 걸까, 이런 슬픔에도 치료가 필요할까, 동그랗게 둘러앉았는데 나는 고개도 못 들고
(...)
- 슬픔의 왕, 김상혁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 / 김상혁 / 아침달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는 김상혁 시인을 비롯한 20명의 시인들이 그들과 함께 사는 반려견을 주제로 여러 편의 시와 짧은 산문을 엮은 책이다. 나한테는 반려견이나 반려묘가 없는데도, 시인들이 그린 개의 모습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만나는 건 완전히 새로우면서도 뭉클한 경험이었다. 특히, 시인의 언어로 그려지는 개의 움직임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내가 잘 모르는 강아지는
집 안 차가운 돌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책을 읽는다
노트를 펼치고 멋진 생각을 꼼꼼히 적는다
내가 모르는 강아지는
아주 사소한 질병도 앓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특별한 행운이라 여긴 적이 없고
탈 없는 지난 십 년처럼 앞으로도 그러리라 믿고 있다
(...)
내가 알 수 없는 강아지의 봄날
그는 끝없이 손 내미는 사람에 관하여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강아지를 강아지로 만드는 것은 예민한 코가 아니라고 생각해보았다
그러면서 내가 잘 모르는 강아지는
그가 지나쳐버린 봄날에서 계속 멀어졌다
어쩌다 머리 꼭대기에 떨어져 말라가는 배롱나무 꽃잎도 모르고
언젠가 적어둔 멋진 생각이 되기까지
지팡이 짚고 서야 할 노견이 되기까지
내가 잘 모르는 강아지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 내가 잘 모르는 강아지, 김상혁
슬픔을 슬픔으로 이기는 시의 세계
사실 아직도 시를 잘 모르겠다. 한동안 시에 푹 빠져서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작품집을 수집하듯 구매해 읽었지만, 어떤 시가 좋다면 왜 좋은지 여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내가 매일 저녁 숨죽여 읽었던 시집들의 공통점은 '슬픔을 슬픔으로 이겨내는 힘'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유쾌한 표현이 등장하지도 않고,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표현들이 쏟아지는데도, 시에는 묘한 힘이 있다. 비관과 좌절, 불행과 상실을 묘사한 시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우리는 힘을 얻는다.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시의 세계는 그렇게 돌아가나 보다, 정도로 생각한다.
P.S.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
위의 글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김상혁 시인의 첫 번째 정식 시집은 민음사에서 출판된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이다. 나는 김상혁 시인을 현대문학 출판사에서 나온 <슬픔 비슷한... 시간>으로 알게 되어, 나중에서야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라는 시집을 읽었고... 시집에 대한 감상평은 '무시무시하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였다.
(좋아하는 시인이기 때문에 한 작품도 놓치지 않으려고 사서 보았다. 시집 뒤에 붙은 평론을 읽어보면서라도 이해하려 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나중에 김상혁 시인과 오은 시인이 하는 낭독회에 그의 2번째 시집과 3번째 시집을 들고가 사인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도 읽었는데, 사실 저는 아직 잘 이해가 안돼서..."라며 말끝을 흐렸더니, 김상혁 시인은 본인도 '그 시집은 좋아하지 않으며, 절대(?) 읽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ㅎㅎㅎ 시인도 변한다는 걸, 김상혁 시인의 1번째와 2번째 시집을 찾아 읽어보며 알 수 있었다. 앞으로 또 어떻게 변화된 시집이 나올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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