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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 실감 ›,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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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여행은 달이 없다는 전제하에 시작되었다

달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걷는 동안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달은 다르면서도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달을 찾으려면 밤의 한가운데로 가야 한다는 내게

너는 바다에서만 헤엄칠 수 있는 건 아니라 했고

모든 얼굴에서 성급히 악인을 보는 내게

사랑은 비 온 날 저녁의 풀 냄새 같은 거겠지 말했다

 

우리는 보폭을 맞추며 씩씩하게 나아갔다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온갖 종류의 그리움 같아 내가 말하면

구름이 아름다운 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겠지

핑퐁을 치듯

 

이따금 일렁이는 불에 젖은 마음을 말려보기도 했지만

언제나 시간은 거대한 장벽을 펼쳐 보일 뿐이었다

 

달 없는 밤을 견디기 힘들었다

고작 무릎까지밖에 안 오는 물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많았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우리는 신이 놓쳐버린 두 개의 굴렁쇠처럼

 

하루하루를 굴려 잿빛 바다에 이르렀다

 

고작 이런 풍경을 보려고 여기까지 온 것일까

너는 헤엄치는 법을 알아야만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했지만

 

내일부턴 더 추워지겠네 쓸쓸히 웃었다

너무 어두워서 분명해지는 세계가 거기 있었다

 

- 안희연 ‹ 실감 ›, «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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