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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또는 월기?

누구도 읽을 일 없는 이 책을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쓰는 태도를 우리는 품위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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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누구나 죽을 때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자신만이 읽을 수 있는 외로운 책을 갖게 된다. 자신만이 읽었고 읽을 수 있으며 단 한 번 낭독되었고 앞으로 결코 완독될 일이 없는 책이다. 누구도 읽을 일 없는 이 책을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쓰는 태도를 우리는 품위라고 부른다." (153쪽)

- 김겨울, 책의 말들

 

2021년도 막바지니까... 블로그를 한 지 올해로 8년째인데, 나는 블로그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써본 적이 없다. 스무 살 무렵에 시작해 대학생활을 꽉 채운 네이버 블로그에는 학과에서 들었던 프랑스어 수업에 대한 번역 과제나 리포트가 수록되어 있다. 프랑스 영화 읽기 수업을 시작으로 종종 영화 리뷰를 올리기 시작했지만, 대학생 때는 나의 자아가 기자에 가깝다고 느껴서였던지 허투루 쓴 글이 하나도 없다. 

 

취업을 하기 조금 전에는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되었다. 브런치는 블로그하는 사람들의 취향과 미감을 정확하게 담은 플랫폼이다. 짧은 에세이를 써도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어준다. 그렇지만 브런치에 아무 글이나 쓰고 싶진 않았다. 브런치의 시작이 무엇이었던 간에, 내가 생각하는 브런치는 셀프 브랜딩 플랫폼에 가깝다. 셀프 브랜딩을 위한 공간에 축축한 일기 같은 걸 써버릴 순 없다. 

 

회사를 다니면서는 개인 블로그에 글을 쓸 일이 없었다. 정말로 2년 넘게 브런치를 건드리지 않았다. 회사에서 글을 쓰니까 내 공간에 쓸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던 것 같다. 글을 쓰려니 또 대단한 걸 써야 할 것 같았다. 일을 시작하니 프로 의식만 자꾸 높아져서, 가끔씩 대작을 만들 생각만 하지 꾸준히 쓰는 사람이 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시 블로그를 하고 싶다,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기엔 네이버 블로그도 브런치도 너무 완벽하게 그려진 명화처럼, 혹은 깔끔하게 정리된 호텔방처럼 어지를 수가 없을 만큼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래서 티스토리 블로그로 유목민처럼 떠나왔다. 회사 일 때문에 구글 SEO에 대해 골똘히 생각할 일이 많았으니 시험 삼아 내 블로그를 만들어보자는 것도 있었고, 티스토리는 처음 하는 거니까 왠지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고 내 공간을 다시 꾸밀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진짜진짜 내가 쓰고 싶은 것만 써야지. 남들처럼 식당이나 카페 다녀온 리뷰도 올리고 별 것 아닌 일도 줄글로 쭉쭉 써내려가야지, 했는데... 습관이 들어서 그런지 다시 고고한 리뷰를 쓰고 있더라. 배우 덕질로 호기롭게 시작했는데, 후반부에 쓴 글들을 다시 보니 아무래도 힘이 들어갔다.

 

 

요즘은 '나는 왜 이렇게 오락가락할까?'라는 고민이 떠나질 않는다. 로나코 새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2019년의 나보다 20년과 21년의 나는 좀 더 꾸준하지 못했다. 회사야 꾸준히 다니고 있는데(이것만으로도 칭찬해야 하나?), 회사 밖의 내 자아들을 자꾸만 잃어가는 느낌이 컸다. 내가 좋다고 생각한 일은 며칠도 안 돼 싫증이 났고, 싫증 났던 일을 다시 주워서 계속 할지 말지 미련만 많아지는 날들이 반복됐다. 기분 좋을 때 약속하면 안 되고 기분 나쁠 때 사람을 끊어내면 안 된다는데, 내가 못하고 있는 게 딱 그거였다. 

 

지난 주와 이번 주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내년이 자신이 없고 기대되지 않는다'라는 점이었다. 회사에서 내년에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내가 그걸 정말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올해는 어떻게든 넘겼는데 내년에도 그럴 수는 없을 텐데. 무엇보다 핑계처럼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고민이다. 작년 말에는 새로운 일을 잘 해낼 거라는 자신감은 없어도 어떻게든 배워서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더 컸는데, 올해는 왜 그럴까. 어느덧 몸이 편해져버려서 그럴까? 어떤 이유든 지금의 내 모습이 별로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올해의 수확이 있다면 11월부터 프리랜서로 회사 밖에서 일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건당 수입이 적지 않은 편이라 이 일을 잘 키워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긴다(블로그를 꾸준히 해야겠다는 생각 또한). 회사를 다니기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나의 목표는 어떤 일이든 해서 회사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되는 거니까. 이제야 발을 뗐다고 할 수 있으려나. 회사 밖에서 일을 받고 보니 사람들 사이에서 빛나는 나의 재능이라는 게 보다 명확해 보여서 좋긴 하다. 문과생의 불안감과 동시에 욕심도 많은 편이라 이것저것 많이 찔러보는 편인데, 결국 내 재능은 글쓰기 분야에 있는 것 같았다. 근데 회사는 재능만으로 다닐 수 없으니까, 이래저래 생각이 다시 많아진다. 

 

"그러므로 책 읽기란 얼마나 비효율적인 행위인가. 어떤 이들은 문학을 읽지 않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한다. 허구의 세계가 쓸모없다 믿고, 당장 써먹을 만한 지식을 알려 주는 책만이 가치 있다 여긴다. 그러나 비효율이 곧 우리가 삶을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힘임을, 더 나아가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힘임을 경청하는 이들은 안다. 이 힘이 쓸모없다는 평가를 받더라도 한탄할 것은 없다. 슬프지만 어쨌든 우리 모두 바쁘지 않은가." (29쪽)

- 김겨울, 책의 말들

 

요새는 텍스처(texture)라는 앱을 쓰고 있다. 독서하는 사람들의 소셜 플랫폼이라는데, 각자 멋진 문장을 올리고 다른 사람이 올린 문장을 수집할 수 있다. 어디 돌아다닐 데도 없어서 인스타그램을 보면 자존감이 깎이는 나 같은 사람한테 딱 맞는다. 우울할 때 곱씹어 볼 문장들을 열심히 수집하고 있다. 문장들을 수집하다 보면 내가 편견을 갖고 있던 책들이 달리 보이기도 한다.

 

오늘은 프랑스어 수업을 빼먹으려다가 꾹 참고 수업을 들었다. 외국어로 말할 때의 나는 왜 이렇게 상냥하고 모든 게 괜찮은 사람이 되는 걸까. 간만에 텍스트북을 가지고 수업을 들으니 대학교 수업 같아서 좋았다. 외국어 공부의 장점은 직장인의 자아로서는 전혀 생각할 일이 없는 간단하고 일상적인 질문을 하고 답할 수 있다는 것. 가장 중요하지만 지나치게 일상적이라 물을 일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으면, 우리는 살면서 정말 기본적인 것들을 놓친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서워하는지, 무엇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어떤 것을 왜 하는지, 왜 하지 않는지 같은 기본적인 질문들. 외국어는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 기본적인 질문을 다시 묻고 답하게 한다.

 

내가 왜 내년을 기대하지 못하는지, 더 생각해보고 다시 돌아와 써야겠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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