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비저블맨'의 개봉시기는 2020년 상반기라, 극장을 찾는 사람들도 현저히 줄어들어 개봉 성적 자체는 좋지 않았던 비운의 영화이다. 개봉 전부터 장르는 호러인데, 소재는 투명인간이라 독특한 스토리에 매력을 느꼈다. 근데 보고 나니 역시나 제작사가 '블룸하우스(Blum house)'였다. 블룸하우스는 영화 '겟아웃', '파라노말 액티비티', '해피데스데이' 등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공포/호러물 전문 영화제작사이다.
나는 평소 공포/호러물을 즐겨 보기도 하고, 블룸하우스 제작사에서 나오는 영화들이 가진 독특한 스토리나 시나리오를 특히 좋아한다. 사실 제작사를 살펴보고 영화를 선택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내가 좋아하고 재밌게 본 작품들이 블룸하우스에서 많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장르가 호러인 영화에 대해서는 꼭 제작사를 확인해보는 편이다. 블룸하우스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아래 콘텐츠도 추천한다.
개봉시기가 1년 정도 지난 시점에서 뒷북 같지만, 간만에 재밌게 본 영화이기 때문에 리뷰를 남겨 본다. 영화는 현재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되고 있다.
현대 과학 기술로 새롭게 태어난 '인비저블맨'
줄거리는 심플하다. 투명인간 슈트를 입고 여자주인공 '세실리아'를 괴롭히는 집착 심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실 몰랐는데, 투명인간 스토리는 1897년 하버트 조지 웰스의 소설 <인비저블맨>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원작 소설 <인비저블맨>은 '신체가 투명해지는 약물'을 개발하고 투명인간이 된 주인공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지금 보면 다소 허무맹랑한 상상력이 개입된 원작의 '투명인간'은 현대로 넘어와 조금 더 그럴듯해졌다. 영화 '인비저블맨'의 투명인간은 광학기술을 활용해 온몸에 렌즈가 달린 슈트(옷)를 통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상용화가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렌즈를 활용한 투명슈트는 실제로 몸이 투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온몸에 달린 카메라 렌즈를 통해 촬영된 배경 이미지가 상대방에게 보이는 원리이다.
극중에서는 주인공인 '세실리아(배우 엘리자베스 모스)'가 세계적으로 성공한 광학 기술 전문가인 남편의 집착을 견디다 못해, 한밤중에 저택을 탈출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즉, 영화의 제목이나 원작 소설과는 다르게 '투명인간'이 아닌 투명인간에게 스토킹 당하며 시달리는 '여성'이 주인공인 것이다.
가스라이팅에 시달리는 피해자의 고립감을 극대화
남편의 지나친 집착으로 외부와도 완전히 단절되어 있던 세실리아는 오랜 친구인 '제임스'와 그의 딸이 사는 집에 한동안 지낸다. 그러던 중 남편인 '에이드리언'이 자살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그에 따라 아내인 세실리아에게 상속되는 유산 문제로 변호사이자 에이드리언의 동생인 '톰'을 만나게 된다. 유산 금액은 굉장히 큰데, 이걸 받으려면 2가지 조건이 있어야 했다. '법을 저촉하여 재판 받지 않는 것'과 '정신적으로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 장면부터 세실리아가 결국에는 이 2가지 조건을 못 지키게 될 것이라는... 호러물의 전형적인(?) 복선이 깔리는 걸 알 수 있다.
문제는 남편이 죽었다는데도, 세실리아가 살고 있는 제임스의 집에 꼭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분명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 1명 더 있는 것 같은 느낌. 설명은 안 되는데, 자꾸만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멀쩡했던 가스불이 혼자 점화되면서 불이 붙는다거나, 샤워실 문에 귀신이 찍은 것 같은 손자국이 생긴다. 혹은 아무도 없는데 카펫에 발자국이 생기는 등, 주인공인 세실리아는 미처 인지하지 못한 투명인간의 흔적들이 관객에게 먼저 보이면서 공포감이 극대화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런 세실리아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다. 이미 죽은 남편이 자신을 스토킹하고 지켜보고 있다는 여자의 말을 믿어줄 리가 없기도 하고, 신경안정제를 복용할 만큼 불안감이 극심한 세실리아의 말을 그저 우울증이나 미친 소리라고 치부할 뿐이다. 이런 와중에 투명인간은 세실리아와 함께 살고 있는 제임스와 그의 딸 시드니, 그리고 세실리아의 유일한 혈육인 '에밀리' 마저 위협하기 시작한다.
언니 에밀리에게 독설이 담긴 이메일을 세실리아의 이름으로 보내거나, 재취업을 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간 세실리아의 가방에 포트폴리오를 빼놓는 건 기본. 자신을 달래주는 제임스의 딸 시드니의 얼굴을 세실리아 면전에서 쳐버리는 것까지, 모두 투명인간의 짓임을 세실리아와 관객만이 알 뿐이다. 극중 인물들의 눈에는 투명인간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틀어진 관계의 책임은 모두 세실리아에게 돌아간다. 이는 가스라이팅을 오랜 시간 당한 세실리아에게 극도의 스트레스를 안겨준다. 분명 누군가 나를 모함에 빠뜨리는 게 맞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내 말이 틀렸다고 말하는 상황...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까스로 과거 살던 집에서 에이드리언의 투명 슈트를 찾아낸 세실리아는 그 길로 언니인 '에밀리'를 만나러 간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이 투명인간이 되어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말을 하자마자,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단검이 에밀리의 목을 그어버린다. 세실리아는 이제 미친 여자에서, '혈육의 목을 그어버린 살인범'이라는 누명까지 쓰게 된다.
전형적인 피해자성에서 벗어나 가해자에게 전면적으로 맞서는 주인공
엘리자베스 모스가 연기한 세실리아는 오랜 시간 자신을 가스라이팅하고 무력하게 만들었던 남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으로 처음에 등장한다. 그런 그가 인적도 드문 바닷가의 대저택을 도망쳐 나오는 첫 장면은 보는 관객마저도 숨막히게 만든다. 남편에게서 떨어진 와중에도 남편이 자신이 사는 곳을 쫓아올까봐 집 앞의 우체통도 못 열어보던 세실리아는 영화가 결말을 향해 갈수록 점차 힘을 얻는다. 그녀의 동력이 남편에 대한 증오심에서 오는 것이겠지만, 적어도 영화 '인비저블맨'은 세실리아를 피해자의 프레임에 가두지 않는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는 뉴스를 듣고 투명인간에게 본격적으로 맞서기로 계획하는 세실리아의 얼굴에서는 미쳐 돌아가는 상황에서도 더 이상 소중한 사람들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눈에도, 카메라에도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을 상대하기 위해서 그를 빗속으로 유인하고, 시드니를 위협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몸에 소화기를 뿌린다. 세실리아는 가까스로 투명인간을 총으로 쏴 죽이지만, 죽은 자의 복면을 벗겨보니 남편인 에이드리언이 아닌 동생 '톰'이다.
사실 총에 맞아 죽은 투명인간의 본체가 에이드리언이 아닐 것이라는 점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 남편인 에이드리언이 정말 죽은 게 된다면, 에이드리언 입장에서는 세실리아에게 돌아갈 구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게 동생인 톰이 꾸민 짓이 되어, 남편인 에이드리언은 오랜 시간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 아닌 피해자인 척 연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제임스와 딸 시드니는 죽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세실리아는 톰의 죽음조차도 에이드리언의 계획에 있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세실리아는 결국 자기 손으로 남편을 죽이지 않는 이상, 평생 남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임을 깨닫는다.
딱 한 명만 알 수 있는 '투명인간' 같은 폭력에 대하여
세실리아는 남편 에이드리언과 살았던 집으로 제 발로 다시 들어간다. 남편에게 그동안의 일을 사실대로 털어놓아 보라고 하지만, 자신 또한 모함에 빠졌었다며 끝까지 우기는 에이드리언. 역시나 세실리아에게 '가끔은 스스로가 미친 것처럼 느껴져 불안할 때가 있지?' 같은 대사를 친다. 잠시 남편에게 마음을 여는 듯했던 세실리아는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뜬다. 그 사이 알 수 없는 투명인간의 손길에 에이드리언은 스스로 목을 긋게 되고, 이 모든 장면은 에이드리언이 설치해둔 CCTV에 잡힌다.
카메라가 어디에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세실리아는 남편이 죽어가는 모습을 냉소적인 표정으로 바라보며, 응급차를 부른다. 그리고 투명슈트를 가방에 넣고 그 집을 떠나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다소 비현실적인 결말이기는 하나, 오랜 시간 가스라이팅을 비롯해 폭력에 시달렸던 세실리아로서는 가장 최적의 결말이었을 수도 있다. 투명인간이 에이드리언이었다는 것을 확신한 사람은 마지막까지 세실리아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영화 '인비저블맨'은 '투명인간'이라는 오래된 상상을 현대사회의 만연한 문제와 결합시켜, 보다 현실적인 공포로 풀어낸 의미 있는 작품이다. 영화 '인비저블맨'에서 에이드리언은 물리적으로 투명인간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오랜 시간 세실리아를 남들 모르게 통제하고 괴롭혀 온 '안 보이는 폭력(Invisible Violence)'의 주체이기도 하다. 세실리아가 직접 집으로 들어가 투명슈트를 찾아내고 맞서기 전까지, 에이드리언이 세실리아에게 가했던 폭력은 남들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러닝타임은 2시간 4분. 이야기의 전개 속도가 빨라 2시간이 짧게 느껴진다. 배우 엘리자베스 모스의 놀라운 연기력이 영화의 전체적인 완성도를 책임지는 것 같다. 피해자의 심리 묘사와 그 연기가 굉장히 생생해서, 관련된 아픔이 있는 분들이라면 시청을 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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