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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작품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단편영화 '니믹(Nimic)' 리뷰 : 아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과 동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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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영화 '더 랍스터(The Lobster, 2015)'와 '킬링 디어(The Killing of a Sacred Deer, 2017)'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단편영화를 리뷰해보려 한다. 독특한 주제 의식과 영화 연출, 소름 끼치는 음악 배치로 늘 소름 돋게 하는 란티모스 감독만의 매력이 단편으로 압축되어 더 진하게 남는 것 같다.

 

오늘 본 영화는 단편영화 '니믹(Nimic)'이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니믹' 한글자막을 달아주신 채널 감사합니다.

 

어느 날 처음 보는 사람이 나를 사칭한다면?

영화 '니믹'은 한 교향악단에서 첼리스트로 일하는 남자가 아침에 눈을 뜨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매일 아침 남자는 일어나서 커튼을 열고, 4분 15초동안 계란을 삶아 먹는다. 아이들과 아내는 식탁에 앉아 있고, 남자는 식탁 옆 벽에 기대 서서 계란을 먹고 출근한다.

 

삶은 계란 열심히 기다리는 중!

 

남자가 근무하는 악단에서 첼로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철에서 남자는 건너편에 앉은 처음 보는 여성에게 묻는다. "지금 몇시예요?"

 

 

근데 어이 없게도, 여자가 손목에 찬 시계를 보고도 시간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여자가 다시 묻는다.

 

"지금 몇 시예요?"

 

이 때부터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관객도 알 수 있다. 평화롭게 반복되는 남자의 일상에 작은 균열이 생기는 순간이다. 남자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하철에서 내린다. 문제는 이 여자가 갑자기 남자의 귀갓길을 따라온다는 것.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눈 똥그랗게 뜨고 쫓아올 때 너무 무섭고 기이했다.

 

남자는 여자가 자꾸 쫓아오는 걸 알고 빠르게 걸어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 성공한다. 하지만 왠걸... 여자도 남자가 사는 집의 똑같은 열쇠를 갖고 있다. 

 

문을 따고 들어온 여자는 자신이 이 집의 남편이자 가장이라 주장한다. 원래 남편이었던 남자는 가족들에게 이 여자 좀 내보내게 어떻게 해보라는 시그널을 보내지만, 아이들은 어이 없게도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어떻게 알아? 고작 어린애인걸?"

 

 

 

아무것(Anything)은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 될 수 있다

영화 '니믹'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에 침입한 여자. 그리고 진짜 남편인 나 자신과 이 여자를 가족들이 구분하지 못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혼란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 남자는 자신이 진짜 남편이자 가장임을 입증하기 위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안대를 쓰고 누운 아내를 뒤에서 끌어 안는다. 안대를 쓰고 누운 아내는 원래 남편과 처음 보는 여자 모두에게 한 번씩 백허그를 당하는데, 결국 진짜 남편이 아닌 처음 보는 여자를 남편으로 선택한다.

 

손끝과 발끝만으로 남편으로 당첨되었다.

 

진짜 남편은 쫓겨나고(?), 이 이상한 여자는 남편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원래 남편인 척 행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는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부엌에서 같은 시간동안 계란을 삶고, 같은 자리에 서서 계란을 먹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남편을 흉내낼 수 없는 것은 그의 첼로 실력이지만... 엉망진창으로 연주하며 남편을 흉내내는 이 여자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낸다. 모든 악기가 함께 어우러져 연주하는 악단이기 때문에 실수가 크게 티가 나지 않기도 하지만, 이 여자가 원래의 남자를 대체했다는 것에는 다들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매일의 일상이 똑같아서 다른 사람이 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
근데 첼로 연주는 정말 못 했다. 표정도 별로임...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가 원래 이상한 건 이해하지만... 성별도 다르고, 얼굴도 전혀 다르게 생긴 처음 보는 이 여자를 왜 사람들은 구별하지 못하는 걸까? 왜냐하면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은 남편이자, 아버지이며, 첼리스트라는 역할(Role)은 갖고 있었지만, 그만의 감정과 타인과의 관계, 개성 등 대체되지 못할 이유는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성실하게는 살아내고 있었지만, 아내나 아이들과의 감정을 교류하는 시간이나 남편과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벗어난 그 무언가를 한 적은 없었다. 때문에 겉모습이 완전히 다른 처음 보는 여자에게 남편과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너무 쉽게 빼앗겨버렸고, 가족들도 이를 전혀 이상하다고 감지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니믹'의 제목 'Nimic'은 루마니아어로 아무것(Anything)과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을 모두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영화의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아무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과 같은 의미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다시 말하면 꼭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니까 말이다. 영화 '니믹' 속의 남자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고, 지하철에서 만난 처음 보는 여자에게 자리르 빼앗겨버린 것도 마찬가지이다. 남자는 아무것인 동시에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는 것.

 

 

새로운 세계의 룰을 정하고 그에 따르는 인물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를 몇 번 본 사람이라면, 그의 단편작 '니믹'도 익숙하게 시청할 수 있을 것이다. 스토리는 역시 예측 불가능하지만, 영화가 전개되는 방식과 그에 따른 등장인물들의 대처방식, 음악 연출 등은 란티모스 스타일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스토리 전개 방식 중 하나는 '세계의 룰을 인물들이 직접 정하고 그에 철저히 순응한다'라는 점이다. 단편영화 '니믹'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집에 침입한 여자가 진짜 남편인지 가려내기 위해 침대에 안대를 쓰고 누운 아내를 뒤에서 안아보고 선택하기로 결정한다. 생김새도 다르고 성별도 다른 이 두 명 중 진짜를 가려내기 위해 이런 룰을 적용한다는 것이 관객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고 이상하게만 느껴지지만, 영화 속 세계에서는 지배적인 규칙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정한 룰에 모든 인물이 철저히 따르고 심판 당한다.

 

영화 '니믹'에서는 아내가 발을 쓰다듬어 보고, 남편을 선택한다.

 

이는 영화 '더 랍스터'나 '킬링 디어'에서도 볼 수 있다. 영화 '더 랍스터'에서는 '정해진 시간 안에 짝을 정하지 못하면 동물이 되어야 하는 세계'에서 도망친 인물이 '짝을 정하면 죽임을 당하는 세계'로 이동하며 세계의 룰에 철저히 복종한다. 영화 '킬링 디어'는 평범해보이던 일상에 일련의 사건이 일어나면서, 자식 중 한 명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아버지는 러시안 룰렛식으로 총질을 해서 한 명을 선택하기로 '스스로 룰을 만든다.' 

 

영화 속 세계라는 것이 원래부터 허구이기 때문에 어떤 룰을 정하든 영화적 상상력에 맡길 일이지만, 평범해보이는 일상을 살던 등장인물들이 갑자기 모여서 자기들만의 룰을 만들어 따른다는 점은 기이한 느낌을 준다. 특히 그렇게 만든 말도 안 되는(!) 규칙에 복종하고 누구도 항의하지 않는다는 점이 독특하다. 이런 작위적인 전개방식은 란티모스 감독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 같다.

 

포스터가 늘 감각적이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세계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것 투성이지만, 영화를 작위적으로 비틈으로써 하고 싶은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한다는 점은 나름의 매력인 것 같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송곳니', '더랍스터', '킬링디어' 등을 인상 깊게 보았다면 이 단편작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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