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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작품들

영화 '추락의 해부' 리뷰 : 죽음을 해부하는 과정에서 추락하는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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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프랑스 영화 '추락의 해부(Anatomie d'une chute)'를 상영 기간에 맞춰 극장에서 보고 왔다. 믿고 보는 그린나래미디어에서 배급한 작품이라 개봉 초부터 눈여겨보고는 있었는데, 바쁘다는 이유로 이리저리 일정이 밀려 영화관 근처도 못 갔다. 그러다 상영 기간 끝물에 보게 된 '추락의 해부'. 다소 길고 지루하다는 평도 적지 않아 걱정했는데 막상 보고 나니 담고 있는 메시지도 명쾌하고, 오랜만에 프랑스어 오디오도 길게 듣고, 매력적인 배우들도 알게 되어 만족스러웠다.

 

아래는 영화에 대한 한 줄 평.
 

진실에 눈 감은 어른들의 법정 공방, 본질에 눈 뜬 아이의 대조적인 연출이 인상 깊었음.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처음 '추락의 해부'를 보기로 했을 땐, 그냥 프랑스 버전의 미스터리 장르 또는 법정물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영화의 모든 장면과 스토리를 곱씹어 보면서... 영화 '추락의 해부'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모두 '대조' 또는 '대립'의 이미지로 하나 하나 견고하게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논리와 논리의 대결 : 잔잔하지만 긴장감 높은 프랑스 법정물

영화 '추락의 해부'는 크게 2개의 공간으로 나눠 전개된다. 산드라의 남편인 사뮈엘의 추락사가 일어난 집과, 사건 발생 후 1년이 흘러 재판이 진행되는 법정이다. 이전에 프랑스 영화나 드라마는 자주 봤지만, 법정물은 처음으로 보는 터라 흥미로웠다. 특히 프랑스인은 '토론(Débat)'으로는 절대 지지 않는 민족인데, 늦은 저녁에 방송하는 각종 정치 토론 프로그램을 보면 오디오가 비는 구간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끊임없이 논쟁하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영화 '추락의 해부'는 이러한 프랑스인 특유의 논리 대결이 잘 활용된 작품이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이야기를 이끄는 건 사뮈엘이 죽음이 '산드라에 의한 의도적 살인'임을 주장하는 검사 측과 반대로 '사뮈엘 스스로가 행한 자살'임을 주장하는 변호인단의 대결 구도다. 극중에서 산드라는 남편의 고향인 프랑스에 사는 외국인이라, 영어가 편하고 프랑스어는 서툴다. 어느 조건으로 봐도 쉽게 의심받고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더욱더 긴장도 높게 느껴졌다. 아직까지 영어를 배척하는 경향이 있는 프랑스 특유의 문화적 특성이 십분 반영된 것 같기도 하다.

 

산드라 휠러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산드라를 궁지로 몰아 넣으려는 검사의 말빨(?)을 따라가다 보면, 이 얄미운 법정 싸움을 지켜보는 배심원 중 하나가 된 기분이 든다. 영화의 줄거리 상, 산드라를 제외하고는 사뮈엘을 죽음에 이르게 한 제3의 인물이 존재하기 어렵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시청자 또한 산드라를 은연중에 의심하게 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 그 어딘가

영화 '추락의 해부'는 제목 그대로 사뮈엘의 추락사가 어떻게 해서 일어난 건지 낱낱이 해부하는 과정울 보여준다. 그런데 문제는 죽음의 원인을 명확하게 가리키는 물질적 증거는 부족하고, 타인의 시선으로 해석되는 정황적 증거만 많다는 데 있다. 변호인단과 검사 측은 산드라와 사뮈엘, 아들 다니엘의 주변 인물과 각종 전문가들을 총 동원하여 원하는 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하나의 상황을 놓고도 질문하는 사람에 따라 해석의 여지는 다양해지고... 점점 사뮈엘이 '왜 죽었는가'보다는 '어떻게 해서 죽었는가'를 찾아내기 위한 법정 공방으로 치닫는다.

 

자칫 길고 지루하게만 느껴질 수 있는 이 진실 공방은 '보이는 것''안 보이는 것'으로 나눠 이해하면 훨씬 명료하게 바라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 남편 사뮈엘의 죽음을 처음 발견한 사람 : 시각 장애가 있는 다니엘(아들)과 반려견 스눕  →보지 못함
  • 남편 사뮈엘이 죽게 된 경위 : 3층에 있었음 아무도 실제로 보지 못함
  • 산드라와 다니엘 : 살아 있기 때문에 직접 변론함 → 눈에 보임
  • 사뮈엘 :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증언에서만 존재함 →  눈에 보이지 않고 상상하게 됨
  • 사뮈엘이 저장해 둔 녹취록 : 소리는 들리나 눈에 보이지는 않아 상상하게 됨
  • 어떻게 죽었나 : 각 전문가가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여주므로 눈에 보임
  • 왜 죽었나 : 이 죽음의 핵심이나 →  눈에 보이지 않고 딱히 주목 받지도 못함...

특히 '어떻게'와 '왜'의 대결은 법정 공방이 마지막으로 치닫을 무렵, 최후의 증언을 하게 된 아들 다니엘이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법정 공방을 벌이는 어른들은 사건의 진실에 주목하기보다는, 새롭게 발견한 증거들을 취합해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는 시나리오를 완성할까에 집중한다. 반면 아이(다니엘)는 눈에 보이지 않아 물질적 증거로 제출할 수는 없으나 엄마와 아빠 사이에 서로를 죽일 만한 이유가 정말 있었던 건지, '왜(Why)'에 대해 궁금해한다. 결국 다니엘의 놀라운 기억력에 기반해, 수년간 작가로서도 아버지로서도 많은 좌절감을 느꼈던 사뮈엘이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아들 다니엘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결국 산드라는 무죄 판결을 받게 된다. 이 장면이 특히 재밌었는데, 유명 작가인 산드라의 무죄 판결 소식으로 수많은 기자들이 질문하는 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이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보던 다니엘이 법무부 직원에게 자기 의사를 밝히는 소리는 묻히게 된다. 정말 중요한 걸 자꾸만 놓치는 어른들 사이에서 아이들의 목소리는 쉽게 소외된다는 걸 은유적으로 보여준 장면 아닐까 싶었다. 무엇보다 시각 장애가 있어 사뮈엘의 죽음을 '물리적으로 보지는 못한' 다니엘이 눈이 보이는 어른들조차 무시하고 있었던 문제의 핵심을 짚어낸다는 건 여러모로 생각할 지점이 많은 대목이었다.

 

추락사라는 무거운 주제와 대조되는 아름다운 설경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이 영화는 무척 아름다운 설경을 뒤로 한다. 찾아보니 영화 '추락의 해부'는 프랑스의 알프스 산맥을 끼고 있는 '사부아(Savoie)' 지방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사부아 지방은 프랑스는 물론이고, 유럽인들이 겨울에 스키 바캉스를 위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촬영은 사부아 지방의 '빌라렘베르(Villarembert)' 마을에서 진행되었고, 산드라 가족이 살고 있던 오두막(Chalet)은 쥐스틴 트리에 감독이 찾던 공간과 딱 일치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해당 오두막의 원래 소유주는 한 인터뷰에서 "'추락의 해부' 제작팀은 부분적으로 공사 중이며, 사람이 떨어져 죽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높은(3층) 조건을 갖춘 집을 찾고 있었다"고 밝혔다. 

 

산드라 휠러와 변호사 뱅상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아름다운 설경은 물론, 사뮈엘이 죽은 당일 과장되게 느껴질 만큼 큰 소리로 흘러나오던 시끄러운 음악은 사뮈엘의 죽음을 비극적이고 기괴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미장센으로 작용했다. 새하얀 눈이 덮인 사부아 지방의 설경은 사뮈엘의 혈흔을 더욱더 눈에 띄게 만들었다. 자연의 소리가 전부인 평화로운 자연경관에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큰 음악 소리는 결국 사뮈엘의 자격지심을 보여준다는 걸, 영화의 후반부에서 알 수 있다.

 

부록 : '스완 아를로(Swann Arlaud)'라는 배우의 발견

영화 '추락의 해부'에서 가장 큰 수확은 배우 '스완 아를로(Swann Arlaud)'를 알게 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추락의 해부 연관 검색어 중 하나가 '추락의 해부 변호사(Avocat Anatomie d'une chute)'일 만큼, 존재감이 엄청났던 것 같다(세계인의 눈은 아무래도 똑같은 모양...). 산드라의 오랜 지인이자 무죄 판결을 이끄는 변호사로 나오는 스완은 영화 '여자의 일생', '신의 은총으로' 등으로 국내 개봉작으로도 이미 몇 차례 알려진 인물이다.

 

배우 스완 아를로

 

 

극중에서는 산드라에 대한 의심과 믿음, 그 사이에서 적절하게 균형을 타며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역할을 한다. 처음엔 산드라의 변호인으로서 일정한 거리를 두다가, 재판이 길어지면서 산드라와 가까워지고 인간적인 면모를 조금씩 드러내는 모습이 무척 매력적으로 그려졌다. 

 

너무 귀엽게 그려진 것 아닌가 싶었다... 맥주병이 소주병처럼 보이는 마법

 

 
파란 눈과 은빛 머리칼이 찰떡이라... 그가 나온 다른 작품을 왓챠에서 정주행하려 한다. 이번 영화로 그는 세자르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수상이 완전 납득 되는 연기였고, 다음 포스팅에서는 그의 다른 작품 또는 유튜브에 뜬 인터뷰를 가져와보려 한다.

 

https://www.vogue.fr/article/swann-arlaud-portrait-anatomie-d-une-chute-film-cesar-meilleur-acteur 

 

Pourquoi Swann Arlaud, sacré meilleur acteur dans un second rôle aux César, obsède-t-il le monde entier ?

Depuis la sortie d’Anatomie d’une chute, et surtout d’une vidéo montée par une fan du film, la popularité de Swann Arlaud s’est trouvée propulsée au niveau mondial. Retour sur le parcours d’un acteur à la filmographie impeccable.

www.vogue.fr

 

영화 '추락의 해부'는 제76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시각 장애가 있는 아들을 데리고 사는 한 부부가 외딴 집에서 맞이한 갑작스러운 추락사'라는 줄거리는 생각보다 단순해 보이지만, 2시간 30분 가량의 러닝타임은 밀도가 무척 높다. 쥐스틴 트리에 감독은 죽음의 원인을 해부하는 과정에서 '관계의 해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큰 문제 없어 보였던 관계 사이 사이에 껴 있던 문제들이 곪아 터져 나오며,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서로의 대조적인 시각을 짜맞춰 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밀도 높은 러닝타임에 조금 지칠 수 있는 영화이나, 산드라와 사뮈엘이 맞닥뜨렸던 갈등은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문제라 집중하며 따라갔다. 

 

 

남편의 추락사, 법정에 선 아내… 발가벗겨진 ‘관계의 추락’[새 영화]

‘추락의 해부’, 아래로 아래로 그리고 더 아래로. 이 여성은 대체 어디까지 추락할까. 오는 31일 개봉하는 영화 ‘추락의 해부’를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들 법하다. 유명 작가 산드라(산드

www.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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